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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식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멈추게 된다면 경찰에게 잡힐 것만 같았다. 얼마나 뛰었는지, 어디까지 뛰었는지, 또 여기가 어디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미친듯이 뛰던 태식은 다리가 풀린 채 앞으로 주저앉아 쓰러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여러 개의 숨소리만이 밤공기를 메우고 있었다. 잠시 후 승대가 힘겨워하는 목소리로 고개를 들어 태식을 노려보았다.
"이봐, 방금 당신 때문에 골로 가는 줄 알았잖아!!!"
승대가 말했다. 태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승대는 태식의 멱살을 잡고 눈을 치켜떴다.
"당신이 뭔데 그 난리를 쳐!! 당장 사과해!!!"
"이거 놔!!!"
태식은 승대의 팔을 힘껏 뿌리쳤다. 재섭이 지친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끼어들었다.
"그만해요. 왜 싸우는 겁니까?"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왜 쓸데없이 흥분해서 일을 더 크게 만드느냔 말이야!!!"
어둠이 깃든 밤하늘 아래 세 사람의 말소리가 거칠게 뒤섞여 혼잡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일구가 돌연 웃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일구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뭘 잘했다고 웃어?"
승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세 사람을 쳐다보며 웃고 있던 일구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빤히 보았다.
"그만들하고 황소장이나 잡으러 갑시다. 우리가 떼인 돈 받으러 가자고요."
일구가 말했다. 일순간 심연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춘 채 일구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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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식은 악몽을 꾸었다. 노인이 되었을 때까지 판게아 현장을 떠돌아다니는 꿈이었다. 꿈이 너무도 생생했는지 태식이 일어났을 때, 그의 몸은 땀으로 흥건 젖어 있었다.
지난밤 일구의 말 한마디에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일구의 왠지 모를 당당한 태도에 기가 죽은 듯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내일 아침이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있을 것만 같은 희망에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은 돈으로 캡슐 호텔에 가서 하루를 묵었다. 내일이면 모든게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다음날 아침, 태식이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 들었던 느낌은 참담함이었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상황이 좋아질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한다는 거요?"
그들이 캡슐호텔에서 나왔을 때, 승대가 일구에게 말했다.
"잡으러 간다면서요? 어떻게 할 겁니까? 방법이 있어요?"
일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자신은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다는 듯 멀뚱멀뚱 거리며 먼 곳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당신 어제 무슨 말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겁니까?"
승대가 다시 물었다. 일구는 묵묵부답이었다.
"맙소사....."
승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허탈한 듯 웃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행인이 이상하다는 듯 승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일단 황소장 사무실로 한번 가보는 게 어떨까요?"
재섭이 말했다. 승대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뭐라고? 장난해요? 거기 가서 뭘 어쩌려는 거요?"
"한 번 가봅시다. 까짓 거."
태식이 말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일구를 쳐다보았다. 일구는 멀뚱히 세 사람을 쳐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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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황소장 사무실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물건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커다랗게 뭉친 먼지만이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황소장은 언제부터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걸까? 태식은 텅 비어버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문득 창밖을 보았다. 끝없이 개발되고 있는 회색빛 대지 너머로 판게아 현장이 보였다. 그 속에서 오늘도 부속처럼 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들 중에 능력이 없는 이들은 안드로이드 협상이 완전히 체결된 후, 또다시 AI와 안드로이드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길바닥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황소장 같은 부류의 인간에게 당하든지. 모든 삶의 방향이 두 개의 결론으로 종착된다는 결론에 다다르자 태식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신들 누굽니까?"
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 저희는 그냥........"
재섭이 쭈뼛거리며 말하는 것을 보자 남자는 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도 황소장에게 돈을 떼먹혔군요."
남자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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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송병태라고 소개했다. 그는 바로 옆 사무실에서 황소장과 똑같은 인력 알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다니까요. 황소장 그놈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고 도망가는 바람에 우리까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병태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근심이 묻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아요. 피해는 당신이 입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한 우리가 입은 겁니다."
승대가 말했다. 병태는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직접적인 피해는 당신들이 입었지만 우리 역시 피해자라는 것을 알아주쇼. 우린 모든 신용을 잃었어요. 판게아 현장에서도 그렇고. 생각해봐요. 앞으로 누가 우리를 믿고 일을 하러 오겠습니까?"
병태는 고개를 저으며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 피운 담배를 사무실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혹시....... 황소장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짐작 가는데는 없습니까?"
재섭이 말했다. 병태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그는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예전부터 화성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몇 번 한 적이 있습니다."
"화성이요?"
"그래요, 화성. 최근에는 그런 이야기를 더욱 자주 했고요. 자기는 화성에 갈 거라고 말입니다. 요즘 화성에 판게아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들 아시죠?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인력 소개소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거든요. 사실 지금 달에서는 돈벌이가 썩 그렇게 좋질 않으니까요."
"화....... 화성까지 날아갔다고요?"
승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또 중요한 건 화성으로 가버리면 여기 달에서 존재하던 범죄기록도 적용이 안 된다고 들었어요. 화성에서도 개척지 개발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을 허용한 모양인데, 아마도 황소장도 분명히 이걸 노리고 고의적으로 한탕하고 화성으로 간 것일 수도 있단 말이죠."
"하........ 하지만 화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패스워드가 있어야 하잖아요. 통과하기 전 심사에서 걸릴 텐데요?"
재섭의 말에 병태는 피식 웃었다.
"이 양반들 이거 순진한 소리 하시네. 요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돈만 있으면 그냥 가는 거지. 무허가로 운행되는 민간우주선만 해도 몇 개나 있는 줄 아십니까?"
병태가 말했다. 그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를 한 모금 내뱉은 후 창밖을 쳐다보았다.
"모든 건 내 추측이요. 죽은 사람이 아무 말이 없듯이, 죽을 각오하고 튀어버린 놈이 무슨 말이 있겠소?"
병태는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들어 네 사람을 쳐다보았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 일하실 생각 있으면 우리 사무실로 오세요. 난 황소장처럼 사기치고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안심하고 오셔도 됩니다. 보수도 짭짤하고 괜찮은 일이 있으니까 하고 싶으면 찾아와요. 대신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담배 연기가 문 쪽에서 머물다가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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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까지는 최고 속도의 우주선을 타고 가도 1년이 걸려요. 요금도 엄청나고요. 불법으로 간다면 아마 더 많이 들겠죠."
재섭은 열변을 토하듯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승대는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기분 더러워 죽겠는데 뭘 그렇게 신나게 지껄이는 거요? 제발 그만해요. 더 이상 그런 놈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열 받지만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돈을 받을 거란 생각은 포기하는 게 맞아요. 더 이상 신경써봐야 우리만 괴로울 거요."
승대가 말했다.
"만약 아직도 화성으로 출발 안했다면?"
잠자코 있던 일구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게 일구에게 향했다.
"무슨 뜻이요?"
"말 그대로 아직도 황소장이 화성으로 출발안하고 여기 달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면?"
"당신 그만해!! 어제도 괜히 헛소리하는 바람에 지금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잖아!! 닥치고 가만 있으란 말이야!!"
승대가 일구를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황소장이 아니야.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남아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야. 계속 이렇게 달에 머물러 있거나, 지구로 돌아가는 것. 뭘 하든지 선택은 당신들 몫이야. 난 지구로 돌아갈 거야. 근데 지금 불행하게도 지구로 돌아갈 차비가 없어."
승대는 그들이 방금 전 나온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끝은 송병태를 만났던 황소장의 사무실을 향해 있었다.
"난 다시 가서 송병태란 그 사람한테 가서 일자리를 달라고 할 거야."
"황소장한테 그렇게 당해놓고, 또 그런 소리를 믿는 거요?"
태식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승대는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태식의 말을 제지했다.
"그래, 각자하고 싶은대로 하고 찢어집시다.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이 많으면 달 관광이나 실컷 하고, 아니면 지구로 돌아가든지 하쇼. 만약에 돌아갈 차비가 없거나 지구에 돈을 부쳐달라고 할 처지가 안 된다면 일자리를 달라고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야."
승대는 세 사람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세 사람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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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병태는 다소 의외라는 듯 말했다.
"아까 전에 괜찮은 일이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어떤 일이죠?"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죠."
병태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뒤돌아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잠시 후 병태 앞에 넥스트 화면이 펼쳐졌다.
"일하시게 될 곳은 4-A 판게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4구역을 벗어나거나 그러지도 않고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4-C 판게아 현장입니다."
병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넥스트의 세부항목의 폴더를 열었다. 계약항목들과 여러 사안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요즘에는 안드로이드들이 없어서 괜찮은 일자리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거 아시죠? 여러분들은 예전에 비해 운이 굉장히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으시겠죠?"
승대가 말했다.
"저는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병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식은 그의 미소가 문득 황소장의 웃음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처음 이 곳 달 기지의 판게아 현장에 왔던 날, 황소장은 저렇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제어센터 일을 소개시켜 줄 때도 마찬가지로 저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식은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관두고 지구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머릿 속의 생각과는 달리 입에선 아무런 말도 않았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직진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 앞에 어떤 예측할 수 없는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계속-